한국 사람은 대개 자기 성(姓)과 함께 ‘김해 김씨’, ‘전주 이씨’처럼 본관(本貫)을 말합니다. 성씨는 부계 혈통을 나타내는 표지이고, 본관은 그 성씨의 시조가 자리 잡았다고 여겨지는 지역을 뜻합니다. 같은 김씨라도 김해 김씨와 경주 김씨는 본관이 다른 서로 다른 갈래로 여겨지는 것이죠. 이 성과 본을 대를 따라 기록한 것이 바로 족보입니다.

성이 없던 사람들

지금은 누구나 성을 갖지만,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성씨는 주로 지배층과 일부 양인의 것이었습니다. 노비를 비롯한 상당수 하층민은 성 없이 이름만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성과 본관을 갖추는 것은 그 자체로 어엿한 가문의 일원임을 드러내는 일이었기에, 성씨는 신분과 깊이 얽혀 있었습니다.

모두가 성을 갖게 되기까지

조선 후기 신분제가 흔들리면서, 신분을 높인 이들이 성과 본관을 갖추어 족보에 오르는 일이 늘었습니다. 그리고 1909년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면서 호적에 모든 백성이 성과 본을 등록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성이 없던 사람들이 새로 성을 정하는 과정에서, 김·이·박처럼 널리 알려진 큰 성씨나 이름난 본관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전해집니다.

왜 김·이·박이 이렇게 많을까

오늘날 한국인의 성씨가 소수의 대성(大姓)에 크게 몰려 있는 데에는 이런 역사가 자리합니다. 조선 후기의 신분 상승과 한말의 성씨 보급 과정에서 유명 성씨·본관으로의 쏠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니 같은 본관을 쓴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의 핏줄로 이어진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 집안의 뿌리’ 이야기를, 조선 사회가 크게 뒤바뀐 흔적으로 다시 읽어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