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兩班)은 고려·조선시대 지배계층으로, 조정에서 조회를 할 때 임금을 기준으로 동쪽에 서는 문반(文班, 동반)과 서쪽에 서는 무반(武班, 서반)을 합쳐 부르던 말에서 유래했습니다. 처음에는 관직에 오른 관료 자체를 뜻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 가문과 후손까지 아우르는 세습적 신분 개념으로 굳어졌습니다. 이들은 원칙적으로 생산 노동에 종사하지 않고 학문과 정치에 전념하는 것을 신분의 근거로 삼았으며,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라는 뜻에서 사대부(士大夫)라고도 불렸습니다.
양반이 누린 특권
양반의 가장 큰 특권은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길, 곧 과거(科擧)였습니다. 특히 문과 급제는 가문의 지위를 지키는 핵심 통로였고, 조상 중에 벼슬한 사람이 없이 여러 대가 지나면 양반 대접을 받기 어려웠습니다. 경제적으로는 토지와 노비를 소유해 소작과 노동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생활했고, 무엇보다 군역(軍役)을 면제받는 것이 평민과의 결정적인 차이였습니다. 세금과 군역, 부역을 지지 않으면서 지방에서는 향약과 서원을 통해 여론과 행정에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소수 특권층에서 다수로
조선 건국 초기 양반은 전체 인구의 2~5% 남짓한 소수 특권층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상황이 크게 달라집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국가 재정이 궁핍해지자 정부는 공명첩(空名帖)이나 납속책(納粟策) 같은 제도로 돈이나 곡식을 받고 관직·신분을 팔았습니다. 여기에 몰락한 양반가의 족보를 사들이거나 위조해 신분을 세탁하는 일도 성행하면서, 조선 후기 대구 지역 호적을 분석한 연구에서는 양반 호(戶)의 비율이 19세기에 70% 안팎까지 치솟은 것으로 나타날 만큼 신분의 경계가 크게 흐려졌습니다.
몰락한 양반, 잔반
양반이라고 모두 넉넉하게 산 것은 아닙니다.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여러 대가 지나 경제적으로 몰락한 양반을 잔반(殘班)이라 불렀는데, 이들은 체면 때문에 농사나 장사에 쉽게 나서지도 못한 채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이런 처지는 박지원의 소설 《양반전》에서 신분을 사고파는 풍자로 그려지기도 했습니다.
손과 몸에 남는 흔적
양반은 생산 노동을 하지 않고 이동할 때도 가마나 말을 이용했기 때문에, 손과 다리 등 신체가 노동으로 발달할 일이 적었다고 전해집니다. 이런 이유로 민간에는 손이 곱고 다리가 짧으며 이마가 좁은 것이 양반의 신체적 특징이라는 속설이 전해 내려옵니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옛이야기 속 속설일 뿐, 신체 특징으로 신분이나 혈통을 판별할 수 있다는 과학적 근거는 없습니다.